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혁명 (문단 편집)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케렌스키]] 내각과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 || [[파일:external/fe51d3276b547d79788e06886b73352933b3b6d82ecb0245d2c3e5c4914cb784.jpg|width=250]] || || [[라브르 코르닐로프]] || 7월 시위 이후 농업문제 등에 관한 노선의 차이로 제1차 연립정부는 붕괴했고 8월 6일(7월 24일) 제2차 연립정부가 설립되었다. [[트루도비키]](Labour Group)의 당수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새로운 수상이 되었고 사회주의자 7명, 자유주의자 8명이 각료로 취임했다. 신임 수상 케렌스키에게 비상대권이 주어졌고, 입헌민주당의 요청으로 내각은 소비에트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혁명과 완전히 관계를 끊은 케렌스키는 이제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서유럽의 민주정치에 심취한 각료들은 몸짓과 스타일까지 서유럽을 모방했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내세우며 민중의 혁명적 요구를 묵살했다. 민중의 요구는 [[제헌의회]] 구성 뒤로 미루어졌고, 그 구성 시기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다. 민중들의 마음이 임시정부를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8월 8일(7월 26일)부터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철회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소비에트가 우경화된 지금, 오로지 무장봉기만을 통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즉각 행동하지는 말고 민중들이 좀 더 임시정부에게서 멀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혁명파와 부르주아,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크게 부상했다. 그는 7월 31일(7월 18일) 최고사령관에 오른 후 군사독재를 향한 발걸음을 본격화했다. 군사령관과 보수주의자들 대다수가 그를 지지했다. 8월에 들어 코르닐로프는 군사동원을 개시하며 군대의 일부를 수도 주변에 집결시키고 자파에 있던 주력부대를 훈련시켰다. 8월 24일(8월 11일)의 각료회의에서는 '후방에서의 사형 부활', '지휘관 권한 회복', '병사위원회 권한 제한' 등을 포함하는 코르닐로프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 내각을 끌어내리고 과거로 회귀하기 위한 독자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9월 7일(8월 25일) 코르닐로프는 기병 제3군단을 전선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켰다. 군단장은 수도와 인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9월 8일(8월 26일),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고 모든 권력을 최고사령관에게 넘기라는 최후통첩을 띄웠다. 이것이 쿠데타임을 직시한 [[케렌스키]]는 즉각 코르닐로프군을 반란군으로 선언하고 소비에트와, 심지어 [[볼셰비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다. 코르닐로프의 부대는 즉각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소비에트 지도부와 사회혁명당, [[멘셰비키]]들은 민중들에게 임시정부의 방위를 호소했다. 볼셰비키도 민중들에게 반혁명 분쇄투쟁에 일어서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것이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위한 것도 아님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쨌든 민중들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 결과 코르닐로프가 보낸 전신이 그의 부대에 전달되지도 못했고 반란군이 탄 기차는 철도 노동자들의 방해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민중들에게 간단히 진압되고 말았다. 9월 12일(9월 1일)에는 코르닐로프와 공범들이 체포되면서 반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코르닐로프의 반란 이후, 민중들은 [[부르주아]]와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의 무능함과 혁명을 타도하려는 세력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정부가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그 결과 민중들 사이에서 전쟁 반대와 혁명적 투쟁을 계속해 온 [[볼셰비키]]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민중들은 소비에트의 타협파 대의원들을 소환하고 그 자리를 볼셰비키로 대체했다. 9월 11일(8월 31일), 창설 이래 처음으로 볼셰비키가 다수를 이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즉시 강화, 지주토지의 몰수해, 노동자에 의한 생산통제,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 등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의 결의를 채택했다. 9월 16일(9월 5일)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도 같은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 밖의 많은 도시에서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 무렵 러시아 경제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연료난과 원료부족으로 공장의 가동이 멈추고 식량난도 극심해졌다. 이 모든 것이 부르주아와 지주로 이루어진 임시정부 때문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을 공장을 장악하여 직접 관리를 하고 농민들은 전투적으로 변해 지주를 추방하고 스스로 토지를 재분배했다. 유럽 러시아의 절반 이상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군대도 동요해 지휘관을 추방하고 직접 지휘관을 선출했으며, 전쟁을 계속 거부했다. 한편, 민중의 혁명화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분열은 더욱 극심해졌다.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들은 [[볼셰비키]]에 점점 가까워졌고, 사회혁명당 좌파세력은 독자행동을 선언하며 기존의 사회혁명당[* 사회혁명당 우파: 트루도비키와 인민사회주의자 등이 있었다.]에서 완전독립을 선언했다. 정세는 볼셰비키에게 전적으로 유리해졌다. 이로써 또 한 번의 [[혁명]]이 일어날 모든 준비가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